[인물포커스] 이만수 '삼성 이미지, 탈피하고 싶어요'
오늘의 뉴스 2007. 11. 8. 16:32 |한 소년이 있었다. 달리기를 잘했던 소년은 야구부에 들어갔다. 뒤늦게 들어간 터라 유니폼이 안나왔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물을 떠나르고 운동장에서 돌을 주웠다. 어느 날 화가 난 선배가 후배들을 모아놓고 ‘빠따’를 쳤다. 한 구석에서 떨고 있던 소년에게 호통이 날아들었다. “너는 뭐야? 넌 선수 아니야?” 얇은 트레이닝복 안에는 달랑 팬티 한장 뿐이었다. 열세살 여린 엉덩이는 금세 터졌고 바지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년은 별을 보며 울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열심히 훈련해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고. 다음날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하루에 4시간씩만 자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는 결국 프로야구 홈런왕이 됐다.
SK 이만수(49) 코치가 어떤 사람인가를 표현하는 단어가 여러개 있다. 입심이나 신앙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를 말할 때 키워드는 역시 ‘노력’이다. 중학교 1학년때 눈물을 흘리며 한 약속을 지키기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프로에서 성공한 뒤에도. 은퇴하고 미국에 건너가 ‘선진 야구’를 배울 때도 한결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SK에 합류한 뒤 맞은 첫 시즌에 우승의 기쁨을 누렸지만 36년전의 결심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지난 5일 인천 문학야구장을 찾았을 때 그는 코나미컵 출전을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대구 그리고 인천
그는 프로 원년부터 16년 동안 삼성 선수였다. SK 유니폼을 입은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삼성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이제는 좀 탈피하고 싶어요. 저한테 파란 피가 흐른다는데 사실 야구는 어디에서 하나 마찬가지잖아요. 국내 지도자 생활을 SK에서 시작했으니 여기서 뿌리를 내린다는 마음입니다. 고마운 것은 삼성 이미지가 강한데도 인천 팬들이 저를 받아주고 격려해줘서 같이 어울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는 삼성과의 관계가 좋지않다. 97시즌이 끝난 뒤 반강제로 은퇴해야 했던데다 2003년에는 미국에 있던 그에게 삼성이 코치직을 제의했다가 없던 일로 해버렸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예전처럼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5월 그는 10년만에 대구 구장을 찾았다. 고향팬들은 삼성 유니폼이 아닌 붉은 색 SK 유니폼을 입고 돌아온 그에게 수백송이 장미를 던지며 뜨겁게 환영했다. “깜짝 놀랐어요. 저도 감격했지만 와이프랑 큰 애가 감동받았어요. 그날 아들이 두번 울었어요. 클리닝타임에 장미송이가 그라운드에 날아들었을 때 한번 울고. 9회말이 끝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불렀을 때 또 울었죠. 큰 애는 아빠가 삼성을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미국에 가게됐는지 그 과정을 다 알거든요. 한창 예민한 사춘기때여서 상처가 됐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하더군요.”
인천과 대구 팬 뿐아니라 모든 야구팬이 그에게는 소중하다. 올시즌 프로야구의 화제 가운데 하나가 그의 ‘속옷 퍼포먼스’였다. 그는 원래 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등 떠밀려 약속을 하게됐는데 그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다고 한다. “광주 경기때 밥먹으러 갔다가 신혼부부를 만났어요. 부산팬이었는데 전국을 돌며 여행하다가 인천에서 팬티 퍼포먼스를 봤대요. 진짜 팬티만 입고 나설 줄 몰랐다는군요. 그동안 프로야구에 실망이 컸는데 섭섭했던 마음을 보상받았다면서 앞으로 열심히 야구장에 가겠다고 했어요. 보람을 느꼈죠.”
사실 그는 이전부터 엔터테이너 기질이 있었다. 선수 시절 홈런을 치면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팔짝팔짝 뛰는 요란한 뒤풀이를 했다. 그러다 넘어져 폭소를 이끌어낸 적도 있다. “쇼맨십이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래요. 팬들한테는 사랑받았지만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곱게 보일 리 없죠. 몸에 맞는 공이 많았는데 투수가 화가 나서 맞춘 것도 꽤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런 기질이 미국에서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말이 통하지 않아 선수들이나 다른 코치들과 친해지기 어려웠는데 ‘오버액션’으로 웃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스프링캠프에서 경기하는데 3루코치를 맡았어요. 관중이 200명 정도 됐는데 날도 덥고 점수는 안나고 좀 지루한 분위기였어요. 다들 조용히 경기하는데 3루에서 혼자 방방 떴어요. 렛츠고. 컴온 하고 소리지르면서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심판이 오더니 ‘유 겟아웃’이라고 하대요. 그 정도는 알아듣죠. 왜 퇴장이냐고 대들었더니 ‘유 크레이지’라는 거예요. 심판은 영어로 나는 한국말로 얼굴을 마주대고 싸우는데 관중은 배꼽을 잡았죠. 벤치쪽을 보니 감독이 웃기만 해요. 내가 말이 안되니까 도와줘야 되는데. 할 수 없이 나가려고 하는데 ‘키딩’이라고 하대요. 알고보니 양팀 감독이랑 심판이 짜고 팬들도 있는데 경기가 지루하니까 저를 골려먹자고 한 거예요. 황당하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야구팬을 만들기 위해 이런 것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단장이 와서는 엄지를 치켜들더군요. 그 뒤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가족의 회복
SK가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물리치고 우승을 확정한 뒤 그의 큰 아들 하종(24)이 아버지를 업고 그라운드를 돌아 눈길을 끌었다. 2년전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우승했을 때 대학생이었던 큰 아들은 시험이 있어 현장에서 아버지를 축하해주지 못했다. 그때는 풋볼을 했던 거구의 둘째 아들 예종(19)이 아버지를 번쩍 안아들고 다녔다. 이번에는 둘째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오지못했다.
그는 화이트삭스의 트리플A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던 99년 가족을 미국으로 불렀다. 같은 팀의 타격코치로부터 견제와 모욕을 당하면서 너무 힘들어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중대한 전기가 됐다. “삼성에서 16년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족이 해외로 여행간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애들한테 1년 휴학계 내고 6개월만 함께 있자고 했어요. 여행 가방 3개 들고온 게 결국 8년을 있게됐죠.”
그런데 미국에 온 아이들이 아버지를 슬슬 피하며 눈치를 봤다. “쇼크였어요. 걱정이 돼 왜 그러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와이프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언제 애들과 따뜻하게 대화해본 적 있냐고. 이게 무슨 소린가 했죠. 내가 얼마나 가정적인 사람인데. 그런데 와이프 말이 아빠로서는 빵점이라는 거예요.서운했던 것들 다 얘기하더군요. 제가 야구밖에 몰랐고. 야구가 안될 때면 성질을 부리고. 애가 울면 때리고 그랬다면서.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데 3년이 걸렸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미국에 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야구를 배운 것도 좋았지만 외로우니까 가족이 뭉칠 수 있었어요. 미국에 안갔으면 애들하고 영영 가까워지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제가 현역때 ‘이만수는 집과 교회와 야구 밖에 모른다’고 했는데 그게 순 거짓말이었어요.”
야구 시즌이 끝나고 몇개월씩 쉬는 동안 함께 지냈다. 지금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는 미국생활을 통해 야구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트리플A 월드시리즈때는 구단의 배려로 경기가 끝난 뒤 9박10일간 ‘신혼여행’도 했다. 82년 결혼했을 때 제주도로 3박4일간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삼성이 행크 에런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초청해 경기를 치르는 바람에 신혼여행 도중 돌아왔었다. 부인 이신화씨와 연애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양대때 4시에 일어나서 라면 하나 끓여먹고 천호동에서 장안동 와이프 집까지 뛰어가서 새벽 데이트를 했어요. 천호대교가 1.5㎞였는데 정말 엄청 추웠어요. 학교 에서도 만났죠. 운동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사람은 앉아있고 저는 스윙연습하고 그랬어요.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10년마다 꾸는 꿈
대구중학교 1학년때 청운의 뜻을 세운 이후 그는 계속 ‘10년의 꿈’을 꾸며 살아왔다. 11년 동안 하루에 4시간씩만 자면서 피나는 훈련을 한 덕에 강타자로 자리잡은 그는 ‘다음 10년에는 프로야구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것도 이뤘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간 98년 세번째 꿈을 키웠다. ‘5년간 마이너리그 코치로 미국야구를 배우고 그 뒤 5년은 메이저리그 코치로 활동하겠다’는 것이었다. “10년을 내다봤지만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해보였어요. 보통 일과가 오전 7시에 시작되는데 6시가 되기 전에 운동장에 가서 운동도 하고 그날 할 것을 일일이 적었어요. 영어를 못하니까 미리 준비해야 했죠. 열정이 있으면 못이룰 게 없나봐요. 마이너 코치를 2년 하고 3년만에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 많이 울었다. 에이전트가 ‘한국 후배들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며 돌아갈 것을 권할 때마다 ‘아직 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네번째 꿈은 물론 국내에서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이다. SK 김성근 감독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선수를 다루는 것부터 게임운영과 언론에 대처하는 것 모두 돈주고 배워야하는 것들인데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정말 행운이죠. 시즌 첫 게임부터 한국시리즈 6차전까지 선수들과 나누는 이야기들까지 감독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노트북에 기록했어요. 워드로 800페이지나 되더군요. 제게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90년대 들어 그는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았다. 9회말이면 관중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승부처가 아닐 경우 감독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그를 대타로 기용하곤 했다. “팬들은 제가 좋아서. 제가 타석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제 이름을 불렀지만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죽기보다 싫었어요. 지금은 그 팬들이 고맙고 그때 좀 더 쇼맨십을 보여줄 걸 그랬다고 생각도 하지만 그때는 관중이 불러서 한번씩 나갈 때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야구를 끝까지 잘하다 은퇴하고 갔으면 미국에서 못견뎠을 지도 몰라요. ‘더 힘든 일도 겪었는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참아낼 수 있었어요.” 그 때의 경험에서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내가 잘했을 때는 후보선수들에게 조언해주면 전혀 안들었어요. 경기에 못나가고 벤치에 있을 때 후보선수나 슬럼프에 빠진 후배들한테 이야기를 해주면 귀를 기울이더라구요. 위에서 아래로 이야기해서는 안되고 밑으로 내려와서 위에 있는 후배들한테 이야기해야 통한다는 걸 배웠죠. 동등한 입장에서 선수와 함께 가는 지도자가 될 겁니다.” 10년간 지도자로 활동한 뒤에는 무슨 꿈을 꿀까. 그는 노트북 안에 들어있다는 다섯번째 꿈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며 빙긋 웃었다.
최정식전문기자 bukra@ 사진 | 최재원기자 shine@